미늘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다는 듯 간결하게 '짐 챙겨, 가자.' 하고 말하는 석민 때문에 오히려 아이가 더 놀랐다. 아이는 말까지 더듬으며 어디, 어딜 가요? 라고 되물었지만,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멍하게 석민을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길게 설명하기에는 석민은 너무나 지쳤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한숨을 살짝 내...

그래서,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 석민은 일부러 원우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어귀까지 걸어와 너른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그제야 원우의 방 문갑에서 가져온 알약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원우가 송 영감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지 않았다면 원우가 이런 작은 양약을 서랍 안에 곱게 모셔놓은 것은 영영 몰랐을 터였다. 엿듣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혀에는 여유가 없었다. 석민의 얇은 셔츠를 손끝으로 말아쥐어 잡고, 어머니의 젖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입술을 쪽쪽 빨아대는 원우에게 석민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듯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연신 등을 쓸어내리며 원우를 다독이자 원우가 입술 새로 한숨을 살짝 내쉬며 속도를 살짝 늦추어 천천히 입맞춤을 이어갔다. 이제는 폭주를 당장 ...

덜컹. 문고리가 흔들리는 소리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일하는 아이가 별채를 청소하러 들어오는 기척이라는 것을 깨닫고 석민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장지문을 한참 쏘아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원우가 들어왔다면 그 기운 때문에라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데, 그런 판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조급증을 내는 저를 향한 실소였다. 첫 정...

리네이밍

홍콩의 겨울은 고향의 겨울보다는 따뜻했지만, 대륙에서 불어오는 칼날 같은 바람이 가끔 사람들의 살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살아생전 다시 밟을 일이 요원한 고향 땅이라지만 몇 년을 지내도 익숙해지지 않은 기후는 남자의 마음도 선득하게 만들었다. 머나먼 타국이니 당연하지만, 이곳은 고향과는 햇빛과 비바람도, 흙마저도 영 딴판이라, 이 땅에서 나지 않았으면서...